예술의 도시 파리paris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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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떠나자/프랑스France

예술의 도시 파리paris Ⅲ

by 백조를 꿈꾸는 미운오리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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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Eiffel Tower

파리의 아이콘 설명이 필요 없는 프랑스의 랜드마크로 1789년 프랑스혁명의 100주년 기념으로 1889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임시구조물로 326m의 강철 탑은 귀스타브 에펠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초안을 낸 설계자는 코에클랑가 누기에로 에펠 철강회사의 엔지니어들이었다.. 산업의 호황기를 맞고 있던 기술자들에게 ‘300m’이라는 소재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대담한 도면에 매료된 에펠이 재정고 기술력을 지원하고 나섰다. 에펠탑은 미국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지어지기 전인 193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기록되었고 지금도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거대한 강철 탑이 파리에 세워진다는 소식을 접한 보수 지식인들의 반발은 거셌다. 건축가 가르니에, 음악가 구노, 문학가 모파상 등이 그들이었다. 품격과 격조를 갖춘 석조 건물의 도시에 구조를 다 드러낸 탑을 조성한다는 발상 자체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탑은 개장과 동시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첫 5개월 도안 2000만 명을 동원한다. 또 제1,2차 세계대전 중 안테를 이용한 무선 통신 발달에 기여한 공으로 해체 위기를 모면했고 1964년 국가유산,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Pont Alexandre III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다리로 1900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두 개의 건물과 함께 만들어졌다. 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며 유일하게 중간 교각 없이 양쪽을 하나의 아치로 연결하는 다리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국 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재위한 러시아의 황제의 이름을 붙였다. 역시 박람회를 위해 건설 중이었던 그랑 팔레, 프티 팔레, 앵발리드와 일직선으로 위치한다. 109m의 길이를 단 하나의 아치로 설계한 대담함으로 박람회를 빛냈다. 다리 이름은 협약 당시의 러시아 국왕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 르크뢰조에서 운반해 온 석재로 건설했고 총 15명의 예술가가 장식을 담당했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

앵발리드Les Invalides

앵발리드란 '부상병'이란 뜻으로 루이 14세가 상이병을 치료하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추진한 건물이다. 1735년 완성된 돔 성당이며 1861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가져온 나폴레옹의 유해와 유물이 안치되어 있다. 나폴레옹이 이곳에 안장되었다는 사실 외에 이 장소와 연결되는 것이라면 그가 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극진히 챙겼다는 점이다. 쿠데타에 명분을 주고 우군 조직을 키우기 위한 의도임에도 군인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한다. 이 사이에 프랑스 최초로 상이병에게 명예훈장 수여식을 거행하면서 나폴레옹과 앵발리드의 밀착관계가 형성되었다. 앵발리드 건물은 군사 박물관 외에도 입체 모형 박물관, 루이데쟁발리드 교회당, 앵발리드 돔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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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요 궁전Palais de Chaillot

1878년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센 강의 서쪽 언덕에 지은 건물의 이름은 트로카데로 궁전이었다. 하지만 트로카 언덕의 미관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평을 방아 좌우 날개를 잇는 중앙 건물을 허물게 되었다 재건축을 맡은 카를뤼는 중앙 건물 자리에 자유와 인간의 권리라는 들을 설계하고 1937년의 박람회에 샤요 궁전으로 다시 소개했다.

샤요 궁전

 오페라 가르니에Palais Garnier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 극장과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오페라 극장은 1875년 샤를 가르니에가 나폴레옹 3세의 명에 따라 설립했다. 고전에서 바로크 양식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모두 혼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정면의 위쪽에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이름과 조각상을 볼 수 있다.

프랑스 오페라의 상징이자. 세계 각국의 오페라 극장의 모델이기도 한 오페라 가르니에는 외관보다 화려한 내부로 더 유명한 곳이다. 1858년 나폴레옹 3세가 저격 미수 사건을 겪은 후 자신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 세웠다. 1816년에 착공 1875년에 완공되었다. 기초공사 도중 지하수로가 발견되어 중단되기도 했지만 잘 감춘 덕분에 정형화된 예술품만을 찬미하던 당시 부르주아들에게도 인정받았다.. 소설가 가스통 르루가 이 지하수로에서 영감을 받아 슨 소설<오페라의 유령>은 세기를 넘어선 명작이기도 하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여러 면에서 바로크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을 차용했다. 유채색의 대리석, 금장 장식, 철강 세공, 프레스코 벽화 ,모자이크 바닥 등 넘칠 정초도 장식 예술에 힘을 실었다. 특히 리셉션 홀에서 극장 실내는 잇는 중앙 계단은 가르니에 건축의 절정을 찍는 구조물로 ‘유산안의 유산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완공 다시 극장 내부의 둥근 천장을 르네뵈의 르네상스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샤갈의 작품으로 덮여 있다. 입구 대기실을 거쳐 중앙 대기실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를 해석해 그린 이 중앙 대기실의 천장화 33개는 아카데미 미술의 대가 폴 보드리의 작품으로 음악을 관장하는 성녀 세실과 음악의 신인 아폴론이 주인공이다. 가르니에는 고전 발레극과 클래식 음악회를 주로 상연한다.

오페라 가르니에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14세기 당시 파리의 성벽 지대였던 바스티유 광장 자리에는 성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리슐리외 추기경이 감옥으로 개조했고 대혁명 전까지 왕권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1789714일 포부르 생탕투안 마을 사람들이 감옥을 공격한 것을 기점으로 혁명과 국민, 자유와 인권의 대명사가 되었다. 광장 중심에 솟은 기념탑은 대혁명을 헌정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1792년부터 추진되었다가 1840년에서야 완성되었다. 그 사이 나폴레옹 황제 때는 24m이 청동 코끼리 상 설치가 추진되기도 했다. 현재는 기념비는 그때 제작하던 코끼리 상 반석 위에 세운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1789714일 바스티유 감옥이 파리 시민들에게 함락되면서 프랑스 역사에 획을 긋는 대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발화점은 1세기 전에 찾을 수 있다. 절대왕권 확립을 서둘러야 했던 젊은 루이 14세는 그에 맞는 세계 최대 호화 궁전 건립이 시급했다. 전국에서 국민들을 불러 성을 축조했고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든 상상을 초월하는 공사금은 모두 세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정작 재물을 가진 귀족들 조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모순이었다. 그 와중에 국민들은 스페인, 프로이센과의 전쟁 대금까지 떠안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706년에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가 닥친다. 유럽 최대의 농경지가 대흉년은 맞은 것 이는 밀 공급 부족으로 이어졌고 이는 빵이 주식인 프랑스인들의 위기를 의미했다. 대조적으로 이때 베르사유 궁전의 사치는 극에 달하였다. 왕비가 빵을 달라며 외치는 국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두 계층 간의 대비를 잘 묘사하는 대목이다. 기아와 가난에 생존을 위협받는 국민들의 불만은 1785‘목걸이 사건’ 1789년 루이 16세의 삼부회 결석 등과 맞물려 드디어 폭발한다. 1789년 성난 시민들은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샹젤리제를 거쳐 베르사유에 이른다. 시민들이 왕과 왕비를 압송하면서 왕권을 흔든 것은 맞지만 배후에 그들은 움직여 권력을 잡으려 한 혁명 부르주아들과 혁명 엘리트들이 있었다. 나름 영리한 외교 정책을 통해 국민의 안정을 살피려 했으나 고위 귀족들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했던 마지막 국왕 루이 16세와 그들의 암투와 조작으로 혁명의 희생양이 되었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현재 프랑스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Montmartre

몽마르트르란 원래 순교자들의 시체를 쌓아두었던 언덕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초까지는 풍차가 돌아가는 시골 마을이었으나 20세기에 점차 가난한 화가나 시인들 외국인들이 싼 생활비 때문에 이곳에 모여 살게 되었다. 고흐나 로트렉,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로 유명해진 이곳 몽마르트르는 20세기 조 세기의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구역이다. 1860년대까지 파리의 외곽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자 드니의 길이라는 전설과 언덕이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종교, 문화적인 정체성이 뚜렷했었다. 그런 곳에 점점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피카소와 르누아르가 작품 활동을 했고 로트레크는 이곳을 그렸다.

 

사크레쾨르 성당Basilique du Sacre-Coeur de Montmartre

비잔틴 양식의 돔으로 이루어진 이 성당은 높은 언덕에 세워진 새하얀 건물이라 눈에 잘 띈다. 11876년에 착공 1919년에 완공되었다. 대혁명과 공포정치 등 불안정한 정국을 거쳐 프랑스 제3 공화국의 수립을 수립을 축하하고 시민들이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정부에서 건립을 주도했다. 자재로 쓰인 흰돌들은 샤토랑동의 채석장에서 조달한 것으로 빗물에 싯기는 특징 때문에 세월이 지나도 하얗게 유지된다고 한다. 사크레쾨르란 성스러운 마음 즉 성심이라는 뜻 성당 정면에는 구스타브 미셸이 조각한 성심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양쪽에는 리포리트 르페브르가 조각한 쟌 다르크와 생 루이의 동상이 서 있다.

사크레쾨르 성당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

파리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은 장소 중 한 곳, ‘몽마르트르 화가들의 광장으로 더 유명한 테르트르 광장은 대부분 18세기에 지어진 저택에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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