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여행의 이유 시기리야Sigir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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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떠나자/스리랑카Sri Lanka

스리랑카 여행의 이유 시기리야Sigirya

by 백조를 꿈꾸는 미운오리 20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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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Sigirya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에 스리랑카를 오는 이유를 시기리야라고 할 만큼 경이롭고 신비로운 곳이며 세계 10대 혹은 8대 불가사의에 단골로 선정된 곳이다. 시기리아는 ‘사자의 언덕’혹은 ‘사자의 목구멍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기 5세기 스리랑카의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함락되고 27년간 타밀의 지배를 받으며 싱할라 왕조는 붕괴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런 혼란기에 다투세나는 타밀 세력을 밀어내고 아누라다푸라를 수복시킨다.. 다투세나에게는 후계자로 장자인 카샤파가 아닌 둘째 목갈라냐를 후계자를 생각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카샤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범한 후 동생 목갈랴나를 죽이러 갔지만 이미 남인도로 탈출한 후였다. 쿠데타로 옥좌에 오른 카샤파는 심각한 정신 분열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점차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고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 왕궁을 건설하기 위해 오랜 세월 승려들의 수행 장소로 쓰고 있던 바위 요새를 찾아내 483년 축성을 시작했다. 카샤파가 시기리야로 천도한 지14년이 흐른 497년 남인도로 도망간 이복동생 목갈랴나는 타밀로부터 원군을 지원받아 스리랑카로 진격해 오고 카샤파는 목갈랴나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비극적 생을 마감했다. 그 후 목갈랴나는 아누라다푸라로 수도를 다시 옮기고 시기리야는 승려들의 수행 장소로 돌려주었다.. 그 후 1898년 영국군 장교이자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1,4001,4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시기리야Sigirya

 시기리야 바위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서남쪽 입구의 가든 지역과 동북쪽의 주거 지역으로 구분된다. 이 두 지역은 디귿자 형태의 성벽이 바위산을 마주 보며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가든 지역의 성벽에는 악어를 키워 방어를 하기 위한 해자가 있지만 주거지역에는 해자가 없고 성벽만 있다. 해자를 건너 성벽을 통과하면 연못과 긴 수로 분수로 정원을 꾸며 놓아 물의 정원이라고 하지만 주목적은 건기에 사용할 물을 보관하기 위한 ‘물의 정원’이 있다. 물의 정원을 가로질러 바위 아래쪽은 길 주변에 많은 바위들이 있으며 자연지형물을 이용한 방어시설로 바위와 바위 사이를 석축을 쌓아 성벽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돌의 정원’을 볼 수 있다. 돌의 정원을 지나 만나게 되는 ‘테라스 정원’은 경사를 평지로 만들기 위해 벽돌이나 돌로 쌓은 축대 안쪽에 흙을 넣어 평지로 만든 모양이 테라스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 정원 모두 공간 확보와 방어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이름처럼 관조적이 목적은 아니었다.

영국 식민시절에 설치된 낡은 철제 계단을 오르면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시기리야 미인도’ 가 있다. 원래는 500명의 여인들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18명의 모습만 남아 있다. 지나치면 모를 수도 있는 흙벽이 ‘거울 벽’이 있는데 벽화를 비치게 하여 미인도를 보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반사되는 벽이 아님을 보면 정확하지는 않다. 거울의 벽에는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남겨져 있다.

 

라이언 플랫폼Lion Platfom

‘라이언 플랫폼Lion Platfom’은 왕궁이 자리한 사자 바위의 입구로 거대한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왕궁에 가려면 사자의 앞발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곳을 ‘사자의 목구멍’이라고 하는데 카샤파 자신이 사자이니 ‘누구도 내 목구멍으로 들어온 자는 살아 돌아갈 수 없음을’을 의미하고 있다. 사자의 목구멍으로 들어가 철제 계단을 오르면 카샤파 1세의 왕궁터인 ‘시기리야 왕궁’터가 나온다. 모두 폐허로 벽돌들만 쌓여있지만 연회장은 물론 수영장도 갖춘 완벽한 왕궁이 존재했었다. 왕궁의 위치는 지금 남아 있는 왕의 돌 의자를 보면 전체적으로 동쪽의 왕의 주 활동 거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높은 곳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왕궁을 건설할 때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코끼리를 이용한 승강기를 만들고 물의 압력의 차이를 이용한 대나무 파이프로 정상까지 물을 끓어 올렸다고 한다. 바위산 정상에 서면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침략자를 감시하는 관측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의 의자                                                                           왕궁터                                                          정상에서 본 풍경

※시기리야 락Rock의 전체 모습을 관망하기 좋은 곳은 피두랑갈라Pidurangala이다.

 

야파후와Yapahuwa

2의 시기리야로 불리는 야파후와는 평지에서 90m 높이에 조성되었다. 언제, 누가, 왜 바위 성채를 조성했는지에 관해 정확한 기록이 없어, 정확이 하자면 없는 것이 아니라 기록은 많지만 내용들이 상이해 공통점을 찾을 수 없어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은 곳이다.

절벽에 걸려 있는 듯이 만든 불치사와 돌계단에 남인도 풍 조각들이 있으며 입구 오른쪽에 이곳에서 발굴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뒤에는 13세기 석굴 사원이 있으며 프레스코 벽화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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